18~20세기 회화의 세계 수도 파리는 그 자체로 영감의 원천이다. 하나의 만화경과도 같은 파리의 기념비적인 유산과 도시 전경은 그 신비를 파헤치고자 하는 예술가들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준다. 도서 「파리는 그림」은 1852년 설립된 프랑스 최고의 미술 전문 출판사 라루스의 '파리 미술 안내서' 한국어판이다. 「파리는 그림」에 담긴 19세기 후반 회화 속 파리의 사계절을 만나보자.
파리의 봄
반 고흐는 1886년 3월부터 1888년 2월까지 파리에 머무르는 동안 몽마르트에 있는 자신의 거처에서 교외까지 긴 거리를 산책했다. 이때 교외에서 본 서민과 노동자의 생활은 그에게 놀라움과 매력을 동시에 안겼다. 더군다나 고갱, 피사로, 툴루즈-로트렉, 시냐크로부터 두루 영향을 받으면서 그의 화풍은 계속해서 자유롭고 대담해졌다. 터치를 세분화하고, 색조를 다양화하며, 이미지를 분할하는 방법을 배운 반 고흐는 「클리시 다리에서의 봄 낚시」에서 자기 터치의 긴장감을 온전히 지키는 동시에 인상주의의 방식을 따랐다. 강가의 무성한 초목, 하늘의 미광, 조각배의 오리목은 인상주의자들이 좋아하는 유연한 터치보다 목탄화의 선영에 가까운 붓질로 표현되었다.
노란색과 녹색이 작품의 전반적인 색조를 형성한다면, 작품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비교적 적게 사용된 장미색과 라벤더색이다. 그리고 다리의 아치가 단호한 선으로 표현되었다면, 근경의 풀과 나뭇잎은 돌고 도는 수면 빛 위에서 힘차고 흥겹게 춤을 춘다. 이처럼 아주 온화한 장면 속에서 선잠이 든 듯 한가한, 불분명한 얼굴의 낚시꾼은 인상적이면서도 함축적인 인간의 존재감을 드러내는데, 다리를 덧없이 건네는 희미한 실루엣들이 그러한 존재감을 가까스로 확실하게 붙잡아 둔다.
천의 얼굴을 띈 파리의 여름
1884년 귀스타브 에펠이 에펠탑의 초안을 마련했을 때, 조르주 쇠라는 수도 변두리의 그랑드자트섬에서 본 여름철 일요일의 한가로운 모습을 그림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랑드자트섬의 일요일 오후」에는 반사광으로 반짝이는 센강의 눈부신 수면 위를 원색의 돛단배와 작은 보트가 떠다니고, 강가에는 확실한 특징이 있으면서도 비현실적으로 표현된 사람들이 드나든다. 이러한 비현실성은 여러 가지 기법적 요소에서 비롯되었다. 실루엣을 평평하게 하고 잘라 낸 불완전한 모사, 움직임의 부재 … 하지만 앞에서 뒤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향하는-첫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이중 소실점의 배치가 가장 결정적이다.
그림 앞쪽을 보면, 오른편에 두 명의 산책자가 천천히 의기양양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왼편에는 한가하게 파이프를 피우는 근육질의 뱃사람이 제 딴에는 수수한 기수모를 쓰고 있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우아하게 차려입은 젊은 여성이 낚시 중이고, 그 모습을 옆에 앉은 친구가 감탄하면서 보고 있다. 두 여성 뒤의 간호사는 둥근 머리쓰개로 장식된 삼각형 그려져 있는데, 그 옆에는 그녀가 돌보는 나이 든 여성이 쉬고 있다. 중앙에서 거대한 형상으로 가장 강한 인상을 주는 엄마는 자식과 함께 수수께끼 같은 두 소녀를 향해 걸어간다. 마지막으로 그림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형상이 긴 머리의 어린 소녀는 나무들 사이를 태평하게, 가볍게 뛰어다닌다. 이외의 곳곳에는 한량, 뱃사공, 낚시꾼들이 어렴풋한 실루엣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점묘법으로 그려진 녹음의 강한 빛을 받으며 무위도식 중이다.
쇠라가 목가적인 여름을 그렸다면, 르누아르는 도시의 여름을 그렸다. 르누아르가 눈부신 여름날을 그리기 위해 자리 잡은 곳은 도시의 심장부에 위치한,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다. 「파리의 퐁뇌프 다리」에서 화창한 아침 햇살 속의 행인들은 모자와 양산을 쓰고 있는데, 여기서는 모두가 푸른빛을 한껏 만끽하며 즐겁고 한가롭게 걷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인상주의가 이제 막 시작된 시점에 이미 선구적으로 과감한 기법을 사용한 것이다. 윤곽을 거의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쾌청한 날씨를 뚜렷하게 표현한 실루엣들이 그러한 면을 잘 나타낸다. 이 상황에서 앞쪽에 카노티에를 쓰고 지팡이를 든 행인이 화가의 동생이라는 사실은 의미 있어 보이지 않는가? 화가는 이렇게 행인들을 천천히 지나가게 해서, 그들의 움직임을 최대한 고정한 후 그림에 사실성을 더하려고 했다.
가을의 색깔
보통 봄이 왔을 때보다 가을이 왔다는 사실이 더 잘 느껴진다. 특히 도시의 공원에 가 보면 가을이 왔다는 걸 실감할 수 있는데 여름이 쓸쓸하게 물러나면서 나뭇잎들이 빨갛게 물들고 낮의 길이가 조금씩 줄어드는 모습이 확연하다. 화가들은 늘 가을의 우수에 젖은 상태로 아침 안개(「가을날 아침의 파리 시테섬」)나 붉은 석양빛(「가을날 뤽상부르 공원에서」)에서 영감을 얻는다. 그들이 마주한 자연은 이제 머지않아 찾아올 겨울의 무기력함을 피할 길이 없다.
하얀 겨울
끝으로 겨울의 대표적인 징후는 언제나 눈일 것이다. 눈은 변두리 공업지대의 누추함을 은혜로운 수의처럼 덮기도 하고, 파리의 여러 대로를 소용돌이처럼 자극하기도 한다. 폴 시냑은 「눈 내리는 클리시 대로」에서 잎이 없는 나무들 위로, 굳어진 외벽 구조 위로, 전차 선로로 오가는 행인들의 실루엣 위로 떨어지는 눈송이의 움직임에 점묘법의 마법 같은 효과를 적용했다.
마르셀 르브룅의 「생미셸 광장」은 해질녘 고요하고 시적인 모습이다. 가스등의 따뜻한 빛이 새하얘진 도로와 인도를 비출 때 거리는 더 평온했다.
파리는 그림 Paris des Peintres
위 기사는 책 「파리는 그림」 속 한 챕터를 발췌해 구성했다. 세계 최고의 여행 도시, 세계 문화 수도로 손꼽히는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는 파리의 센강 유역을 세계유산으로 지정했다. 이 도시는 반 고흐, 르누아르, 모네와 같은 천재 화가들이 100여 년 전 감동받은 모습 그대로를 오늘에 전하고 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센강도 몽마르트르도 지금처럼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파리는 수많은 명화를 낳은 도시이자 그 그림들로 인해 영원히 기억될 ‘예술의 수도’이기에.
「파리는 그림」에서는 프랑스 역사·문화에 정통한 예술사학자가 예술가들이 사랑한 파리로 독자를 안내한다. 고흐의 ‘그랑드자트 다리’, 르누아르의 ‘퐁뇌프’, 수잔 발라동의 ‘몽마르트르’, 쇠라의 ‘에펠탑’… 그들이 사랑하고 작품을 남기던 그 시대의 그 거리는 오늘도 그림이다.